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티오피아 제국 (문단 편집) ==== 메넬리크 2세 ==== ||[[파일:il_fullxfull.2820976861_cjcb.jpg|height=300]]||[[파일:c20ae68a3d59ffd50df211ad6e265672.jpg|height=300]]||[[파일:Menelik-II-Emperor-of-Ethiopia-100.jpg|height=300]]|| ||메넬리크 2세||[[아드와 전투]]||메넬리크 2세의 사진[* 메넬리크 2세는 아프리카 흑인들 중 처음으로 자가용을 소유한 인물이기도 하다. 해당 사진은 자가용을 타고 있는 메넬리크 2세의 모습.]|| 근대 에티오피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꼽히는 [[메넬리크 2세]]는 1889년 에티오피아 황제에 즉위했다. 원래 메넬리크 2세는 에티오피아 중앙정부와 반쯤 따로 놀고 있던 쇼아 지방의 왕실 가문에서 태어났다. 정석대로라면 부모가 결혼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출생했기에 왕위 계승권이 없었지만 당시 쇼아의 왕이자 메넬리크 2세의 할아버지인 사일레 셀라시에는 메넬리크 2세에게 왕위계승권이 있음을 인정해주었고, 얼마 가지 않아 사망하면서 쇼아의 왕위는 메넬리크 2세의 아버지인 하일레 멜레코트에게 넘어갔다. 하일레 멜레코트는 1855년 사망했고, 하일레 멜레코트는 죽기 직전 메넬리크 2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멜레코트의 사망 직후 한창 영토 확장과 중앙집권화에 열을 올리던 테오드로스 2세가 쇼아를 에티오피아에 합병해버렸고, 메넬리크 2세는 포로로 잡혀 마그달라 지방에 끌려가 살았다. 다만 테오드로스 2세는 메넬리크 2세를 꽤나 잘 대해주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한편 테오드로스 2세는 쇼아 지방에 비왕족 출신인 아토 베자베를 총독으로 세웠으나, 아토 베자베가 황제에 반기를 들고 떨어져 나가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메넬리크 2세와 쇼아 출신의 왕족들은 최소한 쇼아를 다스리는 사람은 쇼아 왕족 출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왕족 출신인 아토 베자베가 쇼아를 통치하는 것은 옳지못하다 여긴 것이다. 결국 메넬리크 2세는 테오드로스 2세의 감시를 뚫고 쇼아 지방으로 탈출했고, 그 곳에서 사람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아토 베자베를 내쫒은 다음 쇼아 왕위에 오르는 데에 성공했다. 포로가 도망치자 당연히 격노한 테오드로스 2세는 남아있는 쇼아 출신 왕족들과 귀족들의 목을 쳤으나 메넬리크 2세를 다시 사로잡지는 못했다. 메넬리크 2세는 쇼아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이 에티오피아 황가의 직계 후손들 중 하나임을 주장하며 에티오피아 황위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으나, 자신을 잘 대해준 테오드로스 2세를 치지는 못했을 뿐더러 아직 국력도 에티오피아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에 내정을 다지는 데에만 주력했다. 기회는 1868년에 찾아왔다. 테오드로스 2세와 영국 간의 외교 분쟁으로 인하여 몇만에 달하는 영국군이 에티오피아를 침공했고, 이 전쟁에서 테오드로스 2세가 대패하고 자살을 해버린 것이다. 영국군 침공 당시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으나 물자를 제공하는 대신 근대식 무기들을 제공받으며 힘을 키우고 있던 메넬리크 2세는 이때가 에티오피아 황위 계승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동시다발적으로 반란과 부인들의 왕위 찬탈 음모, 군사 원정 실패 등이 연이어 겹치자 일단 보류하기로 하고 이집트에 망명가있던 요한네스 4세를 대신 옹립한 다음 에티오피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메넬리크 2세는 3일 동안 대축제를 열어 민심을 사려 노력했고,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동맹을 맺었으며 무슬림들과도 친분을 쌓으며 에티오피아 내 자신의 기반을 다지며 황위 찬탈의 기회만을 노렸다. 1889년 3월에 요한네스 4세가 수단의 [[마흐디 운동|마흐디 국]]과 전투 도중 총상으로 사망하자 메넬리크 2세는 즉시 자신이 황제임을 선언하고 에티오피아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요한네스 4세의 아들을 포함한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데에 성공했으며, 결국 1889년 11월 3일 엔토토산 마리아 성당에서 에티오피아 정교회 대주교의 성축을 받으며 대관식을 치렀다. ||[[파일:The-throne-house-and-emperors-resident-at-unity-park.jpg|height=300]]||[[파일:1200px-Menelik_II_conquests_map.svg.png|height=300]]|| ||메넬리크 황궁의 모습.[* 해당 건물은 왕좌가 있는 알현실이다. 궁전이라 하기에는 초라해 보이지만 원래 이 황궁을 짓기 전에는 거의 초막이나 다름없는 오두막을 왕궁으로 썼을 정도였다.] ||메넬리크 2세의 영토 확장.[* 주황색 영토가 전통적인 에티오피아의 영향권이었고, 노란색 영토가 메넬리크 2세 때 확장된 권역이다.] || 메넬리크 2세는 즉위 직후부터 천부적인 군사 재능을 활용하면서 에티오피아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는 가장 먼저 16세기 이래 분열되어 제대로 된 국가의 형태도 갖추고 있지 못했던 에티오피아를 통합하는 것에 방점을 두고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실시했다. 메넬리크 2세는 북부의 수많은 부족들을 복속시키면서 북부 국경 지대의 국경을 확립하였으며,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고잠 부족과 티그라이 왕국을 쓸어버리면서 반란의 씨앗마저 없애버렸다. 또한 중부, 남부까지 빠른 속도로 영토를 넓혀나가면서 에티오피아에 협력하는 부족들은 그대로 놔두되, 협력하지 않는 부족들에게는 가차없이 잔혹한 탄압을 가했다. 특히 에티오피아에 반감이 심했던 [[오로모인]]들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고 한다.[* 당시 메넬리크 2세의 러시아 보좌관 출신인 알렉산드르 블라토비치는 황제가 오로모인들의 인구 절반을 학살하면서 아예 반란에 대한 꿈조차 꾸지 못하게 만들려 했다는 증언을 할 정도였다.] 어찌되었든 메넬리크 2세는 1879년부터 1904년까지 몇 십년에 걸친 기나긴 기간 동안 에티오피아 영토를 확장했고, 기관총을 비롯한 군사 무기의 도입과 군대의 육성에도 노력하여 남쪽과 동쪽으로 '''식민지 정복활동'''[*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19세기 후반을 넘어서까지 건재한 것은 물론 식민지 확장까지 꾀한 국가는 에티오피아가 거의 유일하다.]을 했으며, 이는 에티오피아의 면적이 이전보다 두배나 확장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그러나 외세의 위험은 커지고 있었다. 당시는 한창 유럽의 열강들이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제국주의]]의 시대였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맹주들 중 하나였던 에티오피아 역시 서구 세력의 개입을 피할 수는 없었다. 프랑스는 홍해로 들어가는 길목인 [[지부티]]를 장악했고 영국은 수단 남부와 소말릴란드를 강탈했다. 그러나 메넬리크 2세 시기 에티오피아가 대대적인 전쟁을 벌인 상대는 [[이탈리아 왕국]]이었다. 메넬리크 2세가 즉위할 시절, 경쟁자들을 제치기 위하여 이탈리아와 우찰레 조약을 맺었다. 우찰레 조약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에게 [[에리트레아]] 지방을 양도하는 대신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에게 군수물자와 기술을 전달해주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조약 17조, '외교권 관련 조항'에 대한 논쟁이 불거졌는데,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가 외교권을 행사할 때에 무조건 이탈리아의 자문을 받아야 한다고 해석했으나 메넬리크 2세는 '받을 수도 있다'라고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게 더 많은 것을 뜯어내기 위해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티오피아를 침공했으나]] 에티오피아인들과 에리트레아인들의 협공, 그리고 메넬리크 2세의 지휘 덕분에 1896년 [[아드와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을 격파하고 아프리카에서 유일무이한 독립국으로 남는 데에 성공하기도 했다. 메넬리크 2세는 이탈리아와의 전쟁 이후부터 꾸준한 근대식 개혁 정책을 펼쳤다. 애초에 자신이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 전임 황제 테오드로스 2세가 서구 세력인 영국과 전쟁을 벌이다가 자살한 것이었던만큼 메넬리크 2세 역시 서구 열강에 대한 경계심이 대단히 많았다. 메넬리크 2세는 에티오피아에 근대식인 우편, 은행, 철도, 전신 제도들을 도입하는 한편, 서구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북방의 [[러시아 제국]]과 외교관계를 맺어 유럽 세력들을 막아내고자 했다. 1902년에는 4년에 걸친 대규모 철도 확장 공사를 펼치면서 에티오피아 철도 산업을 진흥하려 노력하였으며, 여러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뛰어난 외교술을 펼치면서 에티오피아의 주권 확립을 도모했다. 메넬리크 2세의 눈물나는 노력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1906년에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3국에게서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는 성과를 남겼다. 또한 에티오피아의 현재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를 세운 것도 바로 이 메넬리크 2세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황제가 있는 곳이 곧 수도였던 에티오피아 전통과는 달리, 아예 고정적인 수도를 세워 중앙집권적 정부 구조의 상징을 세운 것이다.[* 메넬리크 2세는 1887년 엔토토 산 인근의 온천에서 야영하다가 그 자리에 수도를 세우기로 결정했더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